퇴직 준비

퇴직 준비 중 현실 자각하게 만든 순간들 – 사소하지만 강렬했던 기억들

canada927 2025. 8. 9. 14:08

퇴사를 준비하게 된 데에는 분명 여러 이유가 있었다. 업무 과중, 성장의 한계, 불합리한 문화 같은 현실적인 이유들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크고 명확한 이유들보다도, 내 마음을 확실히 움직인 건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었다. 말하자면 계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저 지나칠 수도 있는 장면 하나하나가 유독 크게 다가오는 순간들이었다.

예를 들면, 점심시간에 사무실 책상에 앉아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문장이 문득 떠오른 날이 있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며 ‘이 일이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치 제 3자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퇴직이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결국 사람은 거대한 충격보다 일상 속의 작은 불편함에 더 쉽게 무너진다. 나 역시 그렇다. 업무가 많고 회식이 많았던 시절보다도,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월요일 오전, ‘나는 이 자리에 정말 있어야 하는가?’라는 감정이 스치면서 본격적인 퇴직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퇴직 준비를 하면서 현실 자각하게 만든 사소하지만 강렬했던 순간들을 돌아보며 정리해보려 한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익숙한 장면일지 모른다.

퇴직 준비와 그 현실

1초의 말투, 한 줄의 메일, 그날의 표정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내가 가장 처음 ‘이 회사에 더는 애정을 갖기 어렵겠다’고 느낀 건, 업무를 공유받던 동료의 말투 때문이었다. “그거, 그냥 대충 해도 돼요.”라는 말이었다. 그 말 자체는 나에게 편하게 하려던 의도였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 문장에서 ‘어차피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 시간 낭비하지 말자’는 냉소를 느꼈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지는 듯했고, 내가 하는 일이 단순한 처리 대상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가 하는 일에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 한 번은 팀장이 보낸 메일 한 줄이 결정타였다. 수개월간 고생했던 프로젝트를 마친 뒤 보낸 보고서에 돌아온 답장은 “OK” 한 단어였다. 따로 피드백도, 고생했다는 말도 없었다. 누군가는 감정 소모할 일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 메일을 읽고 한참 동안 모니터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애써 만든 결과물이 단 한 줄로 끝났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옆자리 팀원이 회의 중 피곤한 얼굴로 나를 흘깃 보며 말없이 웃었을 때, 나는 그 표정에서 ‘우리 모두 지쳐 있구나’라는 현실을 깨달았다. 다들 힘든 줄은 알았지만, 그 피곤한 웃음 하나가 마치 거울처럼 나를 비추었다. 이처럼 퇴직을 결심하게 만든 순간들은 아주 작고 일상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적 피로감과 무의미함은 어떤 공식 문서보다 강력했다.

회사를 향한 애정이 무너지는 건 ‘업무’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퇴직을 준비하게 되는 데 있어 ‘업무량’이나 ‘성과’는 큰 결정 요소가 되지 않았다. 일은 힘들었지만 견딜 만했고, 야근도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진짜로 버거웠던 건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를 납득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즉, 업무 그 자체보다도 일의 의미가 사라질 때 사람은 조직에서 멀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회의 자리에서 진심으로 고민하고 낸 아이디어가 아무 이유 없이 묵살당할 때. 혹은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하면 “예전에도 해봤는데 안 됐어”라는 식의 반응이 돌아올 때. 이런 반복되는 경험은 조직 안에서 나의 존재 가치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의심이 쌓일수록 ‘여기서 내가 더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커진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 간의 관계 피로도 내 마음을 지치게 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말조심을 하고, 책임을 떠넘기고, 실수를 감추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커졌다. 그리고 그 감정은 어느 순간 내가 회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놓았다. 나에게 회사는 더 이상 성장의 무대가 아니라, 버티기의 장소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감정이 아닌 ‘관찰자 시점’이 퇴사를 확신하게 만들었다

퇴사라는 결정은 대부분 감정에서 시작되지만, 그 결정을 확신으로 바꾸는 건 결국 관찰자의 시점이었다. 나 역시도 처음엔 불만과 불안을 에너지 삼아 퇴직을 준비했지만, 준비가 길어질수록 감정에 휘둘리는 나를 객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나 자신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도를 했다. 마치 다큐멘터리 속 주인공을 지켜보듯, 내가 어떤 말투로 일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받는지, 어떤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지를 기록해 보기 시작했다.

그 관찰 기록 속에서 나는 스스로 놀랐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무기력했고, 남들이 기대하는 만큼만 행동했고, 회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그리고 그런 나를 억지로 붙잡아두는 것이 오히려 비효율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성적으로 보면 퇴사는 손해가 많은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지금 이 무의미한 반복 속에 머무르는 것이 더 큰 손해라는 판단이 섰다.

관찰자의 시점으로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퇴사를 ‘탈출’이 아니라 새로운 이동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는 감정적인 요동 없이, 퇴사를 하나의 인생 전략으로 차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

퇴직 준비는 결국 ‘나에 대한 이해’로 완성된다

퇴직을 결심하게 만든 순간들은 대부분 회사나 타인의 행동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항상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는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 퇴직 준비라는 과정은 결국 타인보다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어떤 말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자존감이 무너지는지, 어떤 구조 안에서 나는 에너지를 잃는지를 스스로 마주하게 된다.

이런 자각이 쌓일수록 나는 더 이상 회사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나의 기준으로 조직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람의 말보다도 나의 감각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퇴직 준비가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단단해졌고, 퇴직을 결심한 나를 더 이상 불안하게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퇴직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너무 큰 계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느끼고 있는 작고 미묘한 불편함이, 당신의 삶이 변화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작은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기에, 지금 이 선택 앞에 서 있을 수 있다. 사소하지만 강렬했던 그 기억들이, 결국 나를 회사 밖으로 이끌었다.